[서울복지신문] 차일피일 미루다 무거운 걸음으로 고향집에 갔다.

칼럼니스트 손창명
칼럼니스트 손창명

지난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두어 번 다녀오긴 했지만 갈 때마다 두려웠다. 아직도 엄마가 그곳에 계실 것만 같은 데 텅 빈 마루가 그저 휭 하다. 가방을 마루 끝에 던져놓고 잠시 길 잃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했다.

공연히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엄마가 계신 곳 찾기라도 하듯이.... 그러다 퀴퀴하고 습습하게 흙냄새 풍기는 토광 앞에 멈춰 섰다. 오래된 집이지만 리모델링해서 옛 모습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토광만큼은 옛날 그대로 쓰고 계셨다. 바닥, 벽, 천정까지 흙으로 지어진 토광인데 바닥은 아주 오랜 세월 다져져서 반질반질했다. 여름이면 시원해서 엄마는 냉장고처럼 사용하셨다.

쌀독은 얼마나 큰지 6.25때 인민군이 들이닥치면 커다란 쌀독을 엎어놓고 그 속에서 아버지는 피난살이를 하셨다고 했다. 그 큰 쌀독에 엄마 심부름으로 쌀을 푸려고 엎드렸다가 거꾸로 박힌 적도 있었다. 겨울이면 엿을 고아서 뻥튀기 한 쌀로 강정을 만들어 주셨다. 당연히 엿과 강정도 이 토광 커다란 항아리에 보관하셨다. 토광은 단순히 물건들 보관소가 아닌 이 집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탯줄 같은 곳이었다.

토광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부터 각종 농기구까지 여기저기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마음도 추 스릴 겸 토광을 청소했다. 대충 물건들을 한곳으로 모아놓고 빈 항아리는 닦아서 햇빛 잘 드는 앞마당에 내놓았다. 마지막 항아리를 들려고 하는데 엄청 무거웠다. 뚜껑을 열어보니 하얀 곰팡이가 두껍게 피어 있었다. 엄마는 이것을 “곰시래기꼈다”라고 하셨다 꾸리꾸리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 뭐지? 손을 넣어보니 지난해 김장때 담아놓은 동치미였다.

이것도 채 다 못드시고……가슴이 찡하게 시려왔다. 엄마는 다른 김치는 안 드시고 동치미만 드셨다. 토광에 있는 항아리의 동치미는 엄마의 신념을 담고 있었다. 80평생 병원한번 안가시고 지팡이 안 짚고 다닐 수 있었던 건 모두 동치미의 힘이라고 여기셨다. 잠시 주저앉았다. 얼떨결에 이곳의 마지막 주인이 되어버린 동치미는 하얀 곰팡이를 뒤 집어 쓰고 꼿꼿하게 버티고 있었다. 다시 일어나 바가지를 손에 들고 항아리로 갔다. 항아리 위에 떠 있는 하얀 곰팡이를 퍼내다보니 노오랗게 익은 동치미가 끌려 나왔다. 잠시 멈추고 무우청이 달려있는 동치미를 찬물에 씻었다. 기다란 무우청 이파리 하나를 뜯어 입에 넣었다. 짭쪼롬 한 것이 시지도 않고 입안에서 군침이 돌았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거른 게 그제야 생각이 났다. 밥 한 덩어리 꺼내서 찬물에 씻은 동치미를 한입 베어 물었다. 동치미는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잊고 있던 허기를 달래줬다. 몇 숟갈 뜨는데 늘 잔소리라고 짜증냈던 엄마 소리가 들려왔다.

아삭거리던 동치미 소리가 멈췄다.

된장고추장이 먹기 좋게 익었는데 언제 내려올래? 봐서요.

열무가 알맞게 자랐는데 언제 내려올래? 봐서요.

가을추수가 끝나고 햅쌀 나왔다 언제 올래? 봐서요.

배추가 실하게 속이 들어찼는데 김장하러 언제 올래? 봐서요.

작은 녀석은 시설에 보내고 이제 네 인생 살아라! 엄마!!!

더 이상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장애 자식을 데리고 사는 딸을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지켜보시던 엄마.

장애 자식을 데리고 살려면 건강해야 한다며 늘 자식의 삶을 구석구석 챙겨주시던 엄마.

나 때문에 땡 빛에서 일하시고, 나 때문에 늘 걱정이 많으시고, 나 때문에 아프시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일하시는 것 같아 싫었고, 나 때문에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아 싫었고, 나 때문에 아프신 것 같아 싫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엄마를 만나면 퉁명스럽고 툴툴댔다. 외 손주 덕분?에 자폐성장애가 뭔지도 아시고 때로는 비정하게 시설에 보내라고 하실 때마다 제대로 인사도 안 드리고 올라오곤 했다. 이런 꼬깃꼬깃한 내 마음은 엄마를 더욱 아프게 하고 끝내 전화통을 붙들고 눈물지으시게 했다.

하얗게 피어있는 곰팡이 같은 자책감은 퍼내고 퍼내도 없어지지 않고, 노오란 동치미는 바가지 끝에서 슬금슬금 올라왔다.

마치 자식 눈치 보며 따라오는 어머니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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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손창명은 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함께 글쓰기를 연습하는 마을기자단으로, 작고 소소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우리의 일상 조각을 함께 맞추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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