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이(왼쪽) 엄마인 은평구의회 부의장 소심향 의원은 '엄마의 마음'으로 구민을 섬기고 있다
윤영이(왼쪽) 엄마인 은평구의회 부의장 소심향 의원은 '엄마의 마음'으로 구민을 섬기고 있다

[서울복지신문] 이제 며칠 후면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되는 나의 아들 윤영아!

네가 태어난 날은, 우리나라에서 30억 아시안 인의 스포츠 잔치가 열리는 날이었고, 온 국민이 잠실 운동장에서, TV 앞에서 함께 모여 화려한 개막식으로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던 때였어. 너도 기뻤는지 그 시각에 고고한 일성을 토하며 세상에 나왔단다.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88 올림픽을 앞두고 치르는 행사로 온 국민이 환호하는 즐거운 날, 첫 아들이 태어나 친가는 물론 아들이 없는 외갓집까지 최고로 경사스러운 날이었단다. 친척들이 축복으로 인사를 전했지만 정작 나는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는지 모른다. 병원에서 3kg의 작은 모습으로 새근거리며 누워있는 네가 너무나 작아보여서 저 소중한 생명을 잘 키워, 훌륭하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 하는 괜한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단다.

집에 와서는 방안에 외풍이 심해 추울까봐 이불을 두둑하게 덮어준 탓인지 땀띠가 온 얼굴을 돋고서야 얇은 이불로 바꾸었단다. 그렇게 작던 네가 젖을 먹으며 포동포동 살이 오르더니 어느 순간 얼굴이 너무 커졌지 뭐니? 어르신들이 옆으로 뉘고, 엎어 키우라고들 말씀하셨지만 숨막힐까봐 한 번도 엎지를 못하다가 용기를 내어 엎었더니 네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똑바로 뉘고는 그 뒤로 한 번도 엎지를 못해 네 뒤 꼭지가 그렇게 납작하단다. 지금 생각하니 병원도 어지간히 다녔었구나. 미간이 넓어서 눈이 몰린 것 같아 안과도 가보고, 코를 골아 이비인후과도 다니고, 감기를 달고 사는 너를 포대기 두르고 어지간히 병원을 들락거렸어.

걸음마를 하고 움직이면서 너는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지. 친가에서도 장손이라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의 사랑이 극진했고, 아들이 없었던 외가에서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너를 보물단지처럼 여기셨단다. 지금도 외할아버지께서 여름이면 항상 너와 동생 윤미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수박, 김밥, 메추리알, 과일 등을 싸서 북한산 계곡물에서 너희들과 놀던 때를 추억하신단다.

지금도 눈에 선하여 아련히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구나. 어리광만 피우던 네가 태권도 학원에 등록하고, 노란색 추리닝에 모자를 쓰고는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첫 인사를 했을 때, 네 생일잔치에 ‘어머님 은혜’를 합창할 때, 혼자 부르는 것도 아닌데 어찌나 감격이 되던지 눈물이 고였고, 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 전체가 운동장에서 모여 음악에 맞춰 율동을 하는데 그것도 뭐가 그리 신기한지 또 감격을 하고, 운동회 날 저 멀리 있는데도 엄마는 너만 보였는지, 모자의 챙을 뒤로 하고 신발 끈을 동여매며 달릴 준비를 하더니, 네 차례가 되어 질주를 할 때 어찌나 소리를 질렀는지 모른다. 1등도 아니고 2등을 했는데도 얼마나 신이 났었던지…!

▲ 엄마는 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당부의 말로 지순한 사랑의 마음을 전했다 
▲ 엄마는 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당부의 말로 지순한 사랑의 마음을 전했다 

네가 철이 들면서 느껴지던 그 감격과 걱정은 어린 시절의 그것과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의 너는 내성적인 성격 속에서도 네 특유의 뚝심이 발휘되어 내내 반장을 하며 리더십을 발휘하였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공부를 등한시했고, 만화방을 들락거리며 말이 없어져서 걱정했었단다. 고등학교에 입학 하면서 말 수는 더 줄어들었고, 시켜도 말을 잘 안 하더니만 한 번은 안방에 들어와서는 진지하게 ‘제과제빵 반’을 들어가고 싶다기에, 한참을 듣고, 내가 조용히 말했었지. “제과제빵도 너무 좋은데 나중에 대학 들어가서 배우면 어떻겠니?”라고. 표현은 안했지만 무척 걱정했었단다.

다행히 그 이후 ‘대학 꼭 간다!’는 문구를 네 핸드폰에 띄운 것을 보고 안심을 했었다. 무엇보다 너의 긍정마인드와 네 장점인 ‘뚝심’을 엄마는 믿었고 필요한 소통은 했기에 덜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대학도 네가 원하던 과이기에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그런데 군대에 입대하여 부대에 배치된 이후 초기에 얼마간 적응을 못하고 정서적으로 불안했고, 위염을 꽤 오래 앓아 위병소에 있었지. 그때 너를 위로와 격려를 한다고 네 동생과 시와 글, 사진, 온 가족의 편지 등을 쓰고, 붙이고, 그려서 너에게 주려고 유치찬란한 노트 두 권을 밤늦게까지 꾸몄던 기억도 나는구나.

군에서 그런 어려움이 중간 중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걱정하지 않은 것은 네가 매일전화를 했기 때문이란다. 때로는 할 말이 없어서 금방 끊기도 했지만 최고로 반가운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는 했지. 제대하는 날까지 한결같이 전화했던 너도 참 대단했어. 제대 후 왜 그렇게 매일 전화를 했냐고 했더니 집에서 걱정할까봐 했다는 네 말에 우린 한참이나 웃었지.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점차 최고의 공병대 시설 감독병으로 위용을 떨치며 모범적으로 퇴역을 하고 복학해서 공부를 마치고 회사에 취직해 지금까지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는 우리 아들을 보면서 ‘아프면서 크는 나무’가 생각났단다.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방황과 고통 그리고 인내라는 것을 통해 인생의 나이테가 생기는 것을 지켜보면서 말이야.

[2부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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