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는 이미지-말, 60X80X90cm, liquid Blood fertilizer, Seeds, Cotton, installation,2016,11,17, Qwon Sun Wang , 권순왕 作
자라는 이미지-말, 60X80X90cm, liquid Blood fertilizer, Seeds, Cotton, installation,2016,11,17, Qwon Sun Wang , 권순왕 作

[서울복지신문] 오래전부터 우리의 음식으로 존재했던 무우 새싹이나 배추는 우리식탁에 주로 오르는 식물이다. 초식동물도 이러한 식물로부터 수분과 영양소를 얻는다. 인간은 동식물을 먹으며 생존한다. 지금까지 과학도서의 생태계 도표는 인간을 정점에 위치시켜 왔다. 이러한 구성의 인식은 자연생태계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간이 만물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과거 오랫동안 나는 죽음이후 흙으로 돌아가서 나무로 피어나는 광경을 기억한다. 식물은 흙으로부터 존재하며 수많은 동물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소비사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간은 자연을 황폐화 시키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인간 중심의 환경에 대해 인간의 피나 동물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를 생각해 보았다.

이 작업은 내가 늘 먹고 있는 식물에 관한 것을 기르고 그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좀더 빠르게 과정을 볼 수 있게 구성해 보기로 했다. 우선 사람이나 동물 이미지를 동물피와 벌꿀을 혼합해서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다. 식물이나 동물, 곤충의 살에는 각기 다른 혈액이 존재한다. 이것으로부터 만들어진 이미지, 그 위에 씨앗을 뿌리고 흙으로 덮는다. 수분을 공급하면 몇일 뒤 싹이 난다. 새싹은 빨리 싹이 나기 때문에 그 과정을 기록하는데 유용하다. 어느 정도 싹이 자라면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혈액은 한 방울씩 식물에 공급된다. 식물은 혈액으로부터 수분을 공급 받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식물 이미지 또한 해체된다.

이 프로젝트는 피를 통한 과학과 문화예술 컨텐츠다. 여기에서 내가 생각한 피를 먹는 식물을 살펴보면, 개념에 있어서 인간과 자연인데 그동안 책에 나타난 생태계의 종 구성도를 보면 피라미드 형태의 도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종의 정점에 인간이 있으므로 해서 모든 생태계를 지배한다는 논리에 부합한다. 이를테면 풀을 동물들이 먹는다는 것, 이러한 수직적 구조를 ‘수평적인 관계’의 도표로 전환하여 과정을 제시하는 것이 본 작업이 지향하는 바다. 자연은 순환의 고리를 갖고 있다는 관계성에 방점을 둔다.

모든 생물체는 거의 어떠한 형태로든 다른 물질을 섭취하며 존재한다. 모기 또한 사람의 피를 먹고 살지 않는가. 본인이 제시한 피를 식물이 먹는다는 설정은 아름답지 않은 가설이다. 그러나 우리의 풍경은 얼마나 불가능한 풍경의 연속인가. 이러한 예는 과학문명의 발전과 함께한, 소비사회가 걸어왔던 비도덕적인 상품에서도 발견되었다. 지금 현대 사회, 특히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가습기 살균제를 기억해보자. 글로벌기업 옥시제품이 우리에게 수증기의 형태로 서서히 엄습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불가능할 것 같은 현실의 간접적인 파괴였다. 이제 모든 과학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해양생태계를 살펴보자. 얼마나 많은 오폐수가 바다생물들을 서서히 병들게 만드는지 말이다. 우리는 그 물을 먹은 해양 생물을 먹는다. 먹는다는 것은 우리의 연결망이다.

우리가 주로 먹는 쌀과의 관계를 반대로 생각해보자. 피가 수분으로 자라는 볍씨에 공급된다면 어떨까. 이것은 정상적인 광경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피는 수분과 영양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일정부분 식물에 영양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간접적으로 식물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식물에게 혈액을 공급하는 것이다. 적혈구의 55%중 물의 비중은 49%다. 물과 피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피를 볍씨에 공급한다면 어떨까. 이것은 식물의 서사에 인간이 개입하는 불편한 콜라주다. 피를 먹고 자라는 식물의 형태를 시각화하는 것은 과학을 미술의 형태로 자연을 사유해 보고자하는 것이다. 식물은 동물의 피를 만들고 피는 다시 순환하여 식물을 만든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수직적 도식을 수평적으로 해체하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보리씨앗에 혈액을 공급하여 재배한다는 설정은 혈액의 양을 적당히 물의 양에 섞는 데에 있다. 그동안 우리의 과학문명은 얼마나 많이 나쁜 공기를 마시게 했는가. 적당량의 물에 혈액을 공급하여 보리를 키워 보고자 한다. 피를 먹고 자라는 식물은 서서히 변이를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 할수록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예측 불가능이다. 인간이 자연을 위해 인간을 위해 행해지는 많은 방법론들은 아직도 미시적인 위치에 있다. 왜 과학과 예술은 만나야 하는가? 과학은 합리성에 기반을 두고 공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 왔다. 현대예술은 비합리적인 부분이 많다. 산업혁명과 소비사회 이후 정보화 사회에 그 합리적인 과학이 왜 예술을 만나려 하는가? 합리성을 가진 과학은 인간을 파괴하였고 파괴를 표현한 현대예술은 오히려 인간을 생각하게 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점에서 피를 먹는 식물은 비합리적이며, 피를 먹여 키워간다는 측면에서 과학적이다. 글로벌 사회이후 모든 분야는 융합적인 관계의 시간을 갖는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초빙교수 권 순 왕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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